음력 유월의 그 뙤약볕에서 아버지의 장례는 치러졌다. 그리 온화하시고 정이 많으시던
아버지의 죽음이 믿기지 않아 집안 어른들 몰래 미처 수시(收屍)도 않은, 아버지의 발을
삼베발 안으로 손을 넣어 살며시 만져 보았다. 마치 다듬잇돌을 만지는 것 같은 서늘함이
손끝에 전해져 왔다.
회사 일을 마치시고 집으로 돌아오시는 아버지의 손이 비어 있을 때는 거의 없었다.
양과자가 어떻게 생겼는지도 모르는 친구들도 있었지만 생크림 과자나 쑈빵,
한천과 팥앙금으로 만들어진 영양갱 그리고 장난감이 늘 아버지의 손에는 있었다.
댓살배기 우리에게만 아닌 어무이한테도 선물을 곧잘 사다 주시곤 하셨는데그 중 기억이 남아 있는 것은 ‘시조사’에서 나온 책이 였는데 책표지가 푸르면서 두터운
‘가정과 건강’이란 책이 있었다.(그 책은우리가 성장할 때까지 꽤나 오래 있었다.)
하모니카를 사주셨고 미군부대 PX에서 흘러나온 앵앵소리를 내며 달리던 자동차와 만화책,
스프링이 삑삑거리던 침대 위에 올려 무릎에 앉히시고 불러 주셨던 클레멘타인.....
클레멘타인을 가르쳐 주시면서 노래에 얽힌 이야기를 들려주셔서 여섯살박이를 울리셨던 아버지.
그리고 ‘똑같은 것은 세 개를 가지고 있으면 안되는 일이라고... 똑같은 건 두 개만 있으면 돼.
나머지 하나는 남의 것이야’ 라는 나눔의 가르침을 여섯 살 계집애에게 가르쳐 주셨던 아버지...
당신은 두벌 이상의 양복도 못 지니고 계셨다.
‘돈을 빌려줄 때는 되돌려 받으려고 하지마라...’ 행여 되돌려 받는 돈이라도 생기는 날엔 온 집이
잔치 분위가 되곤 했다. 공짜 돈이 생겼으니 쓰셔야 했던 거 였다.
그러시던 아버지가 돌아가셨다. 당시의 최고의 학문을 배우셨지만 전혀 쓸모없는 배움이 되어
한많은 삶을 살다 그렇게 허망히 떠나신 아버지... 당신의 이름도 없이 남의 이름으로 살다가신
나의 아버지....떠나셔서 겨우 찾으신이름. (아버지는 6.25 때 사라진 두 동생으로 인한
이데올로기의 희생양이셨다)
하관을 마치고 까까머리 남동생이 고운 흙으로 아버지의 관 위에 허토(虛土)를 했다.(내 머리 속엔 그날의 일들이 요즘 겜코더로 찍은 화면보다 더 살아 있고, 해상도마저 뛰어난
영상으로 남아 있다)
어무이는 이제 겨우 삼십대 중반을 넘어선 당신을 남겨 두고 가신 아버지를 원망할 새도 없이
‘아비 없는 자식들’로 전락한 우리 삼남매의 먹이를 위해, 그리고 자식들의 미래를 위해
직업전선에 뛰어 드셨고, ‘호로 자식’이란 소리를 듣지 않게 하기 위해 엄청난 다짐들로
억압(?)을 강행하셨다.
-myungsu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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