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은 일기 옮기기
오래 된 친구가 왔었습니다.
*그래... 우리 맛난 거 먹구 어디 좀 달려보자.
제주도 오분재기가 들어있는 해물뚝배기와 밥 한 공기를 비우고 드라이브를 나섰습니다.
작년 초봄에 갔었던 길이었는데, 울적하거나 괜스레 가슴이 꽉 막혀 오는 날이면 생각나던 곳이었습니다.
양산 신불산 공원묘지를 끼고 돌아 오르면 저 멀리 가지산 아래 연봉들이 첩첩이 서로를 껴안고 있는 모습에 탄성이 터져 나오는 그런 곳입니다.
해발 500 - 600 미터 정도의 고지로 한참 길을 닦고 있어서 포장길과 비포장길이 번갈아 이어지는...
아직은 공사중이라고 `진입금지`표지판이 있는 것을 무시한 채 산을 올랐습니다.
4륜구동의 큰 바퀴는 쉼표 한번 제대로 찍지 않고 가뿐히 올라 산 정상에 펼쳐진 넓디넓은 목초지 위에서 잠시 쉬었습니다. 바람은 두 볼을 찌르는 날카로움으로 날아 다녔습니다.
한 무리의 젖소가 검불 위를 어슬렁거리고 있었습니다.
*바람 땜에 크지도 못하고 말라버린 풀밭에서 젖소들은 뭘 먹지...
- 겨울에 푸른잎이 어디있어... 농가에서도 예전엔 다 짚 삶아 먹였잖아. 건초이긴 마찬가지지...
*삼월에 왔을 때 길 너무 험해서 더 못 넘어 갔잖아... 중간중간 길이 괜찮네... 더 넘어 가보자. 도로공사안내판에 `어곡-하양대 군도확포` 라구 적혔지? 하양대가 어딘가 하구 저번에 지도책 펼쳐서봤는데... 배냇골 쪽인 거 같더라
토막토막 포장과 비포장으로 이어진 길 모롱이를 돌면서
*야...여긴 궁근정에서 운문사로 넘어가는 길 같지 않니?... 아니... 지리산 칠불암 오르는 모롱이랑 닮았네... 아니... 저기 광양 백운산 길이랑도 닮았어...
- 백운산을 차로 올랐나 보네... 많이 험할 건데...
*음... 험했지 길이 1000미터 넘는 고지에다 임도였거든...
이런저런 얘기로 울퉁불퉁 들쭉날쭉한 길을 내려가는 군데군데 빙벽이 생겨 햇살을 반사하고 있었습니다.
길과 나란히 흐르는 계곡을 만나 차에서 내렸더니 얼어붙은 계곡물 얼음 두께가 10센티나 됨직 해 보였습니다.
그 얼음장 밑으로 물이 흘러 여기저기 탐스런 고드름을 만들고 있었습니다. 제법 넓은 얼음판 위에서 발로 얼음지치기를 하며 고드름 따서 먹었음 좋겠다 했더니 친구가 바위 사이를 오가며 손가락 굵기만 한 고드름 두개를 따서 왔습니다.
- 결빙상태가 좋은데... 너무 깨끗하네...
수정처럼 투명한 고드름에 와서 붙은 햇살을 뚝 분질러 먹으면서
*고드름 얼마만에 먹어보니?
- 사십년은 되었겠다...
*그렇지? 요즘 어떤 사탕이 이 맑은 물사탕 보다 맛있을까...
이 물사탕이 맛있던 그때.. 우리 영혼도 이것만큼 순수하고 맑았겠지... 색소가 만들어지고, 첨가제로 쓰이고, 그러면서 자꾸만 화려해지고.... 그러는 사이 시나브로 우리들의 영혼이, 우리들의 순수가 채색이란 이름으로 더럽혀져 본성을 잃어가고...
- 그렇네... 우리가 하늘, 땅, 나무하고 벗하고 놀았을 때... 나도 하늘이고 땅이고 나무고 그랬던 거 같아...
보이는 건 하늘과 산과 벗은 나무와 바위와 얼음덩이가 돼버린 계곡... 그리고 양지 바른 한 켠엔 키 작은 조릿대가 바람살을 타고 있었습니다.
생각했던 것처럼 길은 그 끝을 배냇골 길에 붙여 놓고 있었습니다.
*배냇골 길 가로질러 계속 가면 어디쯤이 될까...
- 아마 표충사 정도가 되지 않을까...
넘었던 길을 다시 되돌아 왔습니다. 산을 다 넘어 포장길로 들어섰을 때... 덜컹이던 소음이 사라져 잔잔해진 차 속에 감미로운 캐논변주곡이 피아노로 연주되고 있었습니다.
-뭘 멍하니 생각하고 있니..
*응... 겨울하늘.. 겨울산.. 겨울목초지.. 겹겹이 둘러선 연봉.. 겨울계곡.. 고드름.. 겨울햇살.. 투명했던 영혼.. 순수.. 유년.. 채색된 지금의 영혼.. 그리고 캐논변주곡.. 이 모든 것들....
처음 이곳을 찾았을 때 - 우와~~~ 신천지다~~!!! - 하고 소리 질렀었는데 오늘도 그날과 마찬가지로 - 진짜 신천지다... 그러면서 돌아 와 작은 이야기를 이렇게 적고 있습니다.
오늘을 뱉어버리고 싶은 것보다 꼭 품어 안고 싶은 소중함이 훨씬 많은... 참 기분 좋은날이었습니다.
*** 컴을 새로 만들고 나서 백업시켜 놓은 옛날 화일들을 들춰보다 얼른 눈에
들어오기에 잡아서 여기다가 옮겼습니다. 그때 공사 중이던 도로는 이제 깨끗이
포장 되어 그 길을 타고 가다 이어지는 밀양댐길도 혼자 몇 번이나 더 다녀왔답니다.